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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열전 #3] '베르더의 콘크리트', 귄터 베르나르트

칼럼

by 녹백 2021. 4. 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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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편의 레전드 열전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했던 이가 누구인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귄터 베르나르트였죠. 그렇게 잠시 조연으로 등장했던 귄터가 이번 레전드 열전에서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63/64시즌 분데스리가의 출범과 동시에 팀에 합류하며 무려 10년 간 베르더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던 레전드, 그리고 리가 출범 2년 만에 빌리 물타웁 감독이 이끄는 베르더에게 마이스터 샬레를 선사했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귄터 베르나르트의 선수 시절 모습 (출처: DeichStube)


<프로필>
 
이름: 귄터 베르나르트 (Günter Bernard)
생년월일: 1939년 11월 4일
국적: 독일 (슈바인푸르트)
신체조건: 1.79m
포지션: 골키퍼
키커 랑리스테 기록: IK 2회
베르더 소속 리그 출전수: 287경기
베르더 소속 우승 기록:
 

 

분데스리가 x1

 

<선수 커리어>
 
1957~1963 슈바인푸르트 05
1963~1974 베르더 브레멘
1974~1976 아틀라스 델멘호르스트


1. 슈바인푸르트의 자랑

 

귄터 베르나르트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베르나르트(왼쪽)과 슈바인푸르트 05의 레전드인 안드레아스 쿠페르(오른쪽)의 모습 (출처: Wikipedia)

귄터 베르나르트는 독일 국가대표에서 풀백으로 뛴 적이 있는 수비수 로베르트 베르나르트의 아들로, 1939년 11월 4일 슈바인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귄터의 할아버지인 야코프 베르나르트 역시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시절에 슈바인푸르트에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렇게 축구 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귄터 역시 자연스럽게 같은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15살이 되던 해인 1954년 슈바인푸르트 05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이로써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본인까지 총 3대가 슈바인푸르트의 선수로 활약한 것으로 남게 됐다.

 

1960년 10월 15일에 펼쳐진 프랑크푸르트와 슈바인푸르트의 2대 0 경기 이틀 후 발행된 슈포르트-마가친의 표지이다. 사진의 우측 하단을 보면 베르나르트가 공을 잡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출처:&nbsp; Eintracht Frankfurt Archieve)

그는 유스팀에서 좋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며 성장했고, 3년 뒤인 1957년엔 1군으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베르나르트는 59/60시즌에 첫 출전 기회를 부여받는 것으로 시작해 그다음 시즌인 60/61시즌엔 점차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슈바인푸르트 05는 가우리가 시절인 30년대부터 40년대 초반까지와는 달리 남부 오베를리가에서 좀처럼 힘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것이 베르나르트에게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베르나르트는 처참한 공격진과 수비진 때문에 팀의 성적을 끌어올릴 수 없었고 FC 슈바인푸르트 05는 계속해서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팀의 초라한 성적에도 귄터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키커 랑리스테 K-4, K-5 등급을 받으며 본인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베르나르트가 이와 같은 성적을 받았던 1961년 여름과 1961/62 겨울의 랑리스테 골키퍼 부문에서는 베스트팔리아 헤르네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던 한스 틸코프스키가 IK를 휩쓸었다.
 
귄터는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는 영광을 누렸는데, 1962년에 프랑스와 스위스를 상대로 친선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스위스를 상대로는 5대 1의 대승을 거둬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오베를리가 노르트에서 상위권에 머물며 북독일의 강호로 이름을 날리던 베르더 브레멘은 더 좋은 팀으로 이적할 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귄터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귄터가 진 빠지는 리가 시즌을 마치고 절친한 친구였던 하인츠 지돈과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마요르카로 휴가를 떠났을 때, 베르더의 단장이었던 한지 볼프는 그의 호텔을 찾아갔다. 볼프는 귄터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2년짜리 계약을 제시했고, 그렇게 63/64시즌 분데스리가 출범과 동시에 그를 영입하게 된다. 뉘른베르크 역시 영입을 노리고 있었으나, 베르더의 발 빠른 조치에 뒤쳐진 것이다. 이때 베르더는 슈바인푸르트에서 귄터와 함께 뛰고 있던 절친 지돈까지 동시에 영입하였다.


2. 한술 밥에 배부르랴

 

63/64시즌 초반엔 귄터가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되며 클라우스 람베르츠가 골문을 지켰다. 맨 왼쪽부터 발터 나흐트바이, 요제프 피옹텍, 호어스트 두디안, 클라우스 람베르츠, 헬무트 야기엘스키 등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Kicker)

모두의 기대와 달리 그의 베르더에서의 첫 시즌은 원만하지 못했다. 귄터는 인대가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해 반월판 수술을 받으며 한참 동안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때 베르나르트가 부상당하며 이미 큰 공백이 생겼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클라우스 람베르츠와 2군의 모든 선수까지 합쳐 총 여섯 명의 골키퍼가 죄다 부상을 당해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베르더는 은퇴한 지 3년이 지난 드라간 일리치에게 급히 복귀를 요청했고, 여전히 폼을 유지하고 있던 일리치는 6 라운드였던 쾰른과의 경기를 포함해 총 네 경기를 뛰며 얼떨결에 분데스리가 데뷔를 치렀다. (참고: [레전드 열전 #2] '정열의 골키퍼', 드라고미르 일리치) 일리치는 64/65시즌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재 은퇴를 선언했다.
 
베르나르트는 분데스리가 19 라운드에서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 겨우 복귀전을 치르며 2대 0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후 쭉 출전하며 총 15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쾰른전에서 40m짜리 장거리 득점을 허용하고,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는 7대 0 대패를 당하는 등 끔찍한 경기들을 겪으며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필드 위에서 보여준 골키핑 능력과 엄청난 반응 속도는 정말로 우월했다고 한다. 분데스리가 첫 시즌, 빌리 물타웁 체제 하의 베르더 브레멘에서 귄터는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내며 팀을 리가 10위에 안착시켰고 분데스리가 창단 후 첫 우승은 1. FC 쾰른의 것이었다.


3. 그러나 곧이어 찾아온 영광의 순간

 

64/65시즌의 단체 사진이다. 아랫줄 맨 오른쪽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귄터 베르나르트가 보인다. (출처: Kicker)

베르더는 64/65시즌에서의 반등을 노리며 엠게로부터 유망한 리베로 호어스트-디터 회트게스를, 각각 자르브뤼켄과 샬케로부터는 하인츠 슈타인만과 클라우스 마티샥을 영입해 팀의 전력을 보강했다. 전 시즌에 우승팀인 쾰른은 볼프강 오베라트를 필두로 한 선수단을 보유해 막강한 공력력을 자랑했고, 베르더는 이들을 막을 훌륭한 골키퍼와 뛰어난 수비수를 비로소 보유하게 되었다. 그렇게 64/65시즌이 시작되고, 빌리 물타웁의 베르더 브레멘은 뭔가를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64/65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짓고 기뻐하는 장면이다. 왼쪽에서 팔짝 뛰고 있는 귄터 베르나르트,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하인츠 슈타인만, 오른쪽에서 어깨동무하고 걸어오고 있는 막스 로렌츠와 클라우스 마티샥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DeichStube)

귄터는 전 시즌의 아쉬움을 전부 털어내고 싶었다는 듯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방에선 회트게스와 쉬츠가 듬직한 수비를 펼쳤고, 이마저 뚫고 들어온 공격은 귄터가 모조리 막아냈다. 귄터는 스쿼드를 통틀어 유일하게 리그에서 전 경기를 소화해냈는데, 이 30 경기 중 무려 12 경기를 클린 시트로 마무리했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오직 29개의 실점밖에 허용하지 않는 대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진기한 기록을 두고 귄터 베르나르트는 '베르더의 콘크리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64/65시즌 29라운드에서 테오 클뢰크너가 두 번째 득점을 올리는 장면이다. 경기장의 가득 찬 팬들의 모습에서 큰 환호성이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출처: Weser Kurier)

한 경기를 남겨둔 29 라운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엔 4만명들의 관중들이 모여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귄터는 도르트문트의 매서운 공격을 철저히 막아냈고 마티샥, 클뢰크너, 체브로프스키가 차례대로 상대의 골문을 뚫으며 베르더는 3대 0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쾰른이 비기기라도 하면 베르더의 우승이 확정되는 것이었는데, 쾰른이 뉘른베르크를 상대로 0대 0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그 자리에서 모두가 크게 환호했다. 17 라운드에서 브라운슈바이크와 1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 리드를 빼앗겼던 베르더는 끝까지 우승 경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리드를 되찾은 22라운드부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끝끝내 1위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밀레니엄을 맞이한 브레멘의 시내에서는 베르더 브레멘의 첫 리그 우승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출처: 베르더 공홈)

베르더에겐 국가대표 주전급의 선수가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빌리 물타웁 감독은 새로이 영입한 회트게스와 슈타인만을 적극 활용해 수비적 전술을 구사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4-2-4 시스템을 가동했고, 이것이 제대로 맞아 들어 적은 실점만을 허용할 수 있었다. 베르나르트의 폼까지 올라왔으니 베르더의 수비진은 철벽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렇게 견고한 수비에 대해 극찬을 받은 베르더는 쾰른과 도르트문트를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고, 분데스리가 출범 2년 만에 깜짝 우승을 차지하였다. 깜짝 우승이었던 이유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엔 서부와 남부 오베를리가 팀들이 독일을 제패하고 있었고, 북부에서도 베르더 위에 함부르크가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침 64/65시즌이 끝마쳐지던 1965년은 브레멘시 1000주년이라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뜻깊은 해였기 때문에 베르더에겐 이 우승이 더욱 뜻깊었다.


4. 커리어 하이를 맞이하다

 

다음 시즌에도 그는 팀에서 지대한 도움이 되었다. 분데스리가 출범과 동시에 베르더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던 빌리 물타웁 감독은 두 번째 시즌에 팀을 우승시키고 바로 떠났는데, 그를 이어 귄터 브로커 감독이 팀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수비수 발터 나흐트바이는 은퇴했고, 전 시즌에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던 클뢰크너는 에센으로 이적, 그리고 귄터의 절친 지돈은 전력에서 밀려 베르더 II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공백이 생긴 공격진을 오덴세의 욘 다니엘센과 홀슈타인 킬의 만프레드 포들리히를 영입함으로써 메꿔냈다.
 

경기 전 몸풀기 훈련을 하고 있는 귄터 베르나르트의 모습 (출처: NDR)

물타웁 감독은 공격력이 약하니 수비를 단단하게 하자는 전략을 펼쳤다면, 브로커는 나흐트바이로 인해 생긴 공백은 따로 메꾸지 않되 공격력을 크게 강화시키려는 전략을 펼친 셈이다. 그렇게 시즌이 시작되자 귄터는 전 시즌보다 한층 어려워진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즌처럼 수비가 철벽 같지 못했고, 그만큼 위협적인 찬스가 직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귄터 베르나르트는 이것을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키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다. 전반기 동안 새로운 전술에 대한 적응기를 거치며 적지 않은 실점을 허용하긴 했지만, 후반기에 이러한 상황을 뒤집을 수준의 뛰어난 골키핑을 보여주며 본인의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키커 랑리스테 IK-3 등급을 받기에 이른다.
 
팀은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치며 새로운 감독의 체제 하에서 나름 준수한 첫 시즌을 보냈다. 새로 데려운 욘 다니엘센은 5 득점 8 도움이라는 훌륭한 스탯을 쌓았고, 전성기를 맞이한 아르놀트 쉬츠는 한껏 오른 공격력을 자랑하며 20 득점 7 도움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아르놀트 쉬츠는 중앙 수비수~리베로가 주 포지션인 멀티 포지션 자원이었다. 이렇게 새로 영입된 자원도 성공을 거두고 팀의 공격력 자체가 크게 향상하며 한 시즌 동안 총 76득점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에 비해 무려 22 득점이나 늘어났으니 성공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비적으론 나흐트바이의 공백을 메꾸지 못해 지난 시즌 29 실점 만을 허용한 것에 비해 11회의 실점을 더 허용했다. 귄터가 훌륭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혼자 힘으론 감당하기 버거운 공백이었다.
 

65/66시즌의 파르티잔 베오그라드 멤버들이다. 해당 시즌 파르티잔은 유러피언컵에서 무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출처: 나무위키)

베르더는 전 시즌에 리가 우승을 달성했기 때문에 65/66 유러피언컵에 진출할 수 있었다. 첫 라운드에서 베르더는 아포엘을 만났는데 베르나르트가 1, 2차전에서 모두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총합 10대 0 대승을 거뒀고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6강에서 만난 상대가 바로 FK 파르티잔 베오그라드. 1차전에서 베르더는 3대 0으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2차전에서 1대 0 승리를 거뒀지만 만회할 수 없었다. 파르티잔은 이 유러피언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적을 써 내렸다. 하지만 귄터는 유러피언컵에서 정말 좋은 활약을 펼치며 세계 무대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그리고 66/67시즌, 베르더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수비진은 노쇠해졌고 팀의 공격의 중심이 되어주던 마티샥은 고질적으로 그를 괴롭힌 무릎 문제로 인해 점점 뛰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나마 신입 베르너 괴르츠가 본인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며 괜찮은 퍼포먼스를 펼쳤지만 수비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귄터 역시 전반기 동안 팀을 구원하려 고군분투했지만, 후반기에는 본인도 같이 무너져 성적은 추락했고 랑리스테에선 이름 조차 찾아볼 수 없는 불명예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시즌 중후반기에는 베르나르트 대신 람베르츠가 출전 기회를 얻기도 해 귄터의 입지가 불안해졌다.
 

1966년 3월 23일 네덜란드와의 친선전에서 슛을 막으려 몸을 날리고 있는 귄터 베르나르트의 모습 (출처: Wikipedia)

하지만 헬무트 쇤 감독은 귄터를 더 실험해보고 싶었는지 그를 다시금 디만샤프트로 불러들였고, 네덜란드와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한 친선 경기에 출전시켰다. 그리고 귄터는 두 경기에서 선방쇼를 펼쳤고 모두 승리하며 자신의 가치를 몸소 입증했다.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경기에선 팀 동료인 호어스트-디터 회트게스와 막스 로렌츠가, 북아일랜드를 상대로는 회트게스와 제프 피옹텍이 함께 차출되어 경기를 소화하기도 했다.
 

67/68시즌 시작 전에 촬영한 단체 사진이다. 경질되기 전의 브로커 감독 또한 함께 찍혀있고, 람베르츠를 대신해 새로 팀에 합류한 서브 키퍼 카를 로벡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출처: Kicker)

물타웁과 달리 브로커 감독은 두 시즌 만에 처참히 무너졌고 심지어 공격의 주축 멤버 마티샥은 무릎 문제로 이른 나이에 은퇴까지 선언한다. 67/68시즌, 그에게 마지막으로 팀을 되살릴 기회가 주어졌지만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엠게에게 3연패를 당하며 지휘봉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공석은 한스 틸코프스키를 데리고 베스트팔리아 헤르네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프리츠 랑너 감독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 또한 베르더로 향하기 전 엠게와 샬케에서 그저 그런 성적을 냈었기에 팬들은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랑너는 모든 걱정들을 뒤로하고 나아갔다. 부임 후 첫 경기인 브라운슈바이크전에서 완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전환시킨 랑너 감독은 9라운드까지 총 6경기 4승 2무를 기록하며 팀을 중상위권으로 되돌려놨다. 전반기 동안 베르더는 시즌 초의 3연패, 그리고 이후의 3패를 합해 총 5승 3무 6패를 기록했고 점점 반등의 기미가 보였다. 14라운드에선 지난 시즌 포칼 우승과 컵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한 바이언을 상대로 4대 1 대승을 거두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며 분위기가 한껏 올랐다. 그리고 후반기에 접어들며 베르나르트가 초인적인 집중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67/68시즌 31라운드 바이언전에서 볼경합 중인 구스타프 융(왼쪽)과 호어스트-디터 "아이젠푸스" 회트게스(오른쪽)의 모습이다. 아이젠푸스는 독일어로 철로 만든 발이라는 뜻으로 회트게스의 별칭이다. 이날 베르더는 3대 2 승리를 거두며 해당 시즌 바이언을 상대로 더블을 기록했다. (출처: DeichStube)

베르너 괴르츠와 베른트 루프, 그리고 아래엔 막스 로렌츠와 욘 다니엘센을 두어 공격을 퍼부었고 회트게스는 리베로로서 팀의 전반적 플레이를 진두지휘했다. 회트게스는 득점력까지 갖춰 무려 9 득점 2 도움의 스탯을 쌓는, 마치 아르놀트 쉬츠의 전성기 실력에 철벽 같은 수비력까지 더해놓은 듯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뿐만 아니라 귄터 베르나르트는 자신의 신체 조건을 극복하는 초월적인 선방쇼를 보여줬다. 귄터는 본인의 신장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공을 처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완벽한 위치 선정과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으로 부족함을 메꿔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장신인 클라우스 람베르츠와 카를 로베그보다 우월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선수들의 고군분투로 베르더는 시즌 끝에 5연승까지 기록하며 하얗게 불태웠고, 18위까지 추락했다가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북독일 라이벌 함부르크와 강팀 엠게에게 더블을 당한 건 매우 아쉬웠지만, 반대로 바이언과 브라운슈바이크를 상대로 더블을 따낸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그리고 귄터 베르나르트는 시즌 후반기에 보여준 활약을 인정받아 1968년 여름 키커 랑리스테 골키퍼 부문에서 IK-3 등급을 받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1, 2위가 각각 브라운슈바이크의 호어스트 볼테르와 바이에른 뮌헨의 제프 마이어였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가늠이 된다.
 
귄터 베르나르트는 시즌 후반기에 마지막으로 디만샤프트 소속으로 뛸 수 있었는데 그 상대는 바로 웨일스였다. 선발 출전한 골키퍼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호어스트 볼테르였는데, 26분에 웨일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함과 동시에 그는 귄터 베르나르트와 교체되었다. 그렇게 베르나르트는 전방에 팀 동료 회트게스를 둔 채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이후 그의 후계자가 되는 디터 부어덴스키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 출전 경력의 다섯 경기가 모두 친선전인 점은 참 아쉬운 대목이다.


 

5. 저물어가는 전성기, 그리고 틸코프스키와의 재회

 
68/69시즌이 시작되기 전, 팀에서 묵묵히 수비진에 힘을 실어주던 클라우스-아체 해넬이 은퇴했지만 베르더에겐 새로 이적해 온 디터 쳄브스키키와 회트게스, 말년의 아르놀트 쉬츠 등 훌륭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베르너 괴르츠, 베른트 루프의 발끝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전 시즌에 합류했던 올레 비욘모제는 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못했고, 아깝게 1점 차로 패하는 경기도 수두룩했다. 어찌 보면 지난 시즌엔 운이 좀 따랐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결국 베르더는 다시금 중위권인 9위로 내려갔고, 랑너 감독은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 귄터 역시 폼이 많이 떨어졌고 랑리스테는 두 번 모두 B 등급에 그쳤다.
 

틸코프스키는 베르더 브레멘의 공석을 맡고 급한 불을 끄는 데에 성공했다. (출처: 베르더 공식 트위터)

랑너 감독의 공석은 프리츠 레벨에게 넘어갔으나, 그는 24경기 6승 8무 10패라는 처참한 기록을 세우며 경질된다. 그리고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 이는... 바로 베스트팔리아 헤르네에서 최고의 나날을 보내며 귄터 베르나르트와 경쟁했던 골키퍼, 한스 틸코프스키였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감독이 된 틸코프스키는 무너져가던 베르더를 일으켜 세우고 급한 불을 끄기 시작했다. 틸코프스키 체제 하의 베르더는 남은 리그 경기들을 5승 5무 3패로 마무리 지으며 11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소방수로의 역할을 다 한 그는 69/70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났다.
 

70/71시즌 엠게와의 원정 경기에서 골대가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선수들이 골대를 다시 세워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기는 이후에 다시 펼쳐지게 되었다. (출처: Weser Kurier)

70/71시즌엔 귄터는 커리어를 통틀어 한 번 겪기도 어려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70/71시즌 27라운드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원정 경기였는데, 당시의 엠게 홈구장이었던 뵈켈베르크슈타디온에서 펼쳐졌다. 현재 엠게는 보루시아파르크를 홈구장으로 두고 있다. 귄터는 엠게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를 펼치며 88분까지 1대 1 스코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경기 막판 귄터 네처가 올린 크로스를 헤베르트 라우먼이 받아 헤더 슛으로 연결했다. 하지만 귄터가 손가락으로 공을 밀어내며 골대 위로 넘겼는데, 그 순간 골대가 뒤로 기울며 쓰러졌다. 베르나르트는 공을 걷어내고 나니 "크르르" 소리가 나며 골대가 뒤로 쓰러졌다고 표현했다.
 
헤더 슛을 시도했던 라우먼의 몸이 그대로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골대 쪽을 향했고, 그물이 당겨져 골대가 뒤로 넘어갔던 것이다. 라우먼은 몇십 년 후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자신을 향해 넘어지는 골대를 공포스럽게 바라만 보고 있었고, 그물에 걸려 꼼짝 못 하는 상황에선 "마치 그물에 걸린 생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라고 하기도 했다. 다행히 라우먼은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골대를 피하며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무승부로 끝날 가능성이 컸던 이 경기는 이 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뀐 결과를 내놓았다. 쓰러진 골대를 선수들이 서둘러 세워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재경기가 치뤄졌다. 그리고 그 재경기에서 베르더가 2대 0으로 승리하는 행운의 상황이 펼쳐졌다.
 

귄터의 베르더 생활 끝무렵인 1971~1973년 동안에는 브레멘의 상징인 열쇠가 로고에 들어가기도 했다. (출처: DeichStube)

귄터 베르나르트는 사실상 후계자가 필요한 나이에 접어들었고, 전성기에 비해 폼 또한 많이 떨어져 있었다. 베르더는 분데스리가 스캔들로 인해 72/73시즌 강등 징계를 피해 갈 수 없게 된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로부터 디터 부어덴스키를 빼왔고, 세대교체를 꾀했다. 귄터 역시 서브 키퍼로 물러나려 했으나 디터가 비골(종아리의 가는 뼈) 골절상을 당하며 33세의 귄터가 재차 필요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귄터는 거의 한 시즌을 더 뛰며 당시 분데스리가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72/73시즌 종료를 끝으로 베르나르트는 스스로를 벤치로 내려보냈고, 1974년에 팀과 작별인사를 하게 된다. 이후 아마추어 리그 팀이던 SV 아틀라스 델멘호르스트로 이적해 그곳에서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다시 비저슈타디온을 찾아 온 노년의 귄터 베르나르트 (출처: Weser Kurier)

베르더 소속 선수이던 시절, 베르나르트는 스포츠 용품 제조 업체인 푸마의 함부르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부의 대표직을 시작했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여전히 스포츠 용품 산업에 종사했는데, 축구보단 테니스와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베르나르트는 "스포츠는 나의 인생과 같다"라고 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드라간 일리치의 골키퍼 계보를 잇고, 분데스리가 출범 직후 베르더에게 크나큰 영광을 안겨준 귄터 베르나르트. 그는 길이길이 베르더 팬들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로 기억될 진정한 레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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